고급문덕생활자의 수기.
견습키튼_단테 알리기에리가 새겨진
깊은 초록빛의 오로라가 손에 쥐어진다면
나의 영혼은 구원받으리라.
그간 자신이 잡지 편집장이면서 그 잡지의 모든 호에 자신의 글을 실었던 자가 있다. 그는 지난 호에 문방구에 대한 애착을 가진 사람들의 활동, 소위 문덕질에 관한 짧은 한편의 나불나불을 실었다. 흥미로웠다.
“아, 문방구에 이리 애착을 가지는 자가 내 주변에 있긴 있었구나.”
그저 나만의 즐거움인 줄 알았던 일이 다른 누군가의 즐거움이기도 하다는 감격은 생각보다 컸다. 역시 아직 이 세계는 살만한 곳이라는 위안을 가졌고, 함께 걸어갈 동료와 희미하게 연결되어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글을 계속 읽어가면서 일어났다. 그 자는 문덕이기는 하지만 나와는 큰 차이가 있었다. 문방구를 사랑한다는 본질적인 마인드는 같았지만 그것을 사랑하는 방식과 사랑하는 문방구의 차이는 꽤나 컸다. 그 자의 말을 빌리자면 문방구에 투여하는 정체성이 상당히 달랐다.
“이자, 뭘 모르는구만.”
이렇게 되니 슬몃슬몃 올라오는 감정은 비웃음이었다. 좀 전까지의 그 반가움은 저 구석으로 사라지기 시작하고 차가운 비웃음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그 자는 링코, 모닝글로리 등등 우리가 흔히 마주하는 문방구점에서 문방구들을 ‘구경’하고 ‘구입’한다. 그러나 나는 교보문고의 고급 필기구 매장들에서 문방구들을 ‘감상’하고 ‘모셔’간다. 그 자는 호주머니에도 있을 법한 돈으로 다양한 상품을 구입하지만, 나는 고통을 인내하며 쌓아둔, 현금으로 들고 다닐 수 없는 돈을 하나의 작품에 투자한다. 그가 사랑하는 문방구들은 프롤레타리아들이고 내가 사랑하는 문방구들은 귀족들이다.
우리는 문덕 세계의 시민이었지만 계급이 달랐던 것이다. 이 계급의 차이는 비웃음을 낳고 비웃음은 갈등의 씨앗이었다. 좁디좁은 문덕 세계에 분열이 일어날 조짐이었다. 그 옛날 자부심이 넘치던 그리스 아테네에도 같은 일이 일어났었다. 자기 땅을 가지고 번쩍이는 청동 방패와 투구와 정강이 바지를 가진 중갑보병 출신의 농민 계급, 마땅한 땅도 없고 마땅한 전투 도구도 없이 노 젓고 갑판에서 칼 휘두르던 수병 출신의 도시 임노동자 계급.
“청동 방패도 없고 우정 넘치는 진을 구성해보지도 못한 무지랭이들과 같은 시민이라니!”
이들이 같은 시민으로서 동등한 위치에 서면서 비극은 시작되었다. 같지 않은데 같게 되어버린 것에 대한 분노는 분열을 낳았고 분열은 혼란으로 치달았다. 혼란은 결국 아테네의 쇠망의 한 원인을 제공했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은 중갑보병의 마음이었다. 고급 필기구에 파커나 몽블랑을 꼽는 그 무지함이라니! 오호 통재라, ‘고급’의 의미가 어찌 이리되었단 말이냐! 혼란의 시대에 언어의 의미가 변질된다더니 과연 투키디데스의 말은 옳았다. 필기구에 ‘학문’이라는 고상한 가치를 투여하는 자들은 고급 만년필로 오직 오로라를 꼽는다. 경제적 사정이 좋지 않고 이제 막 공부하겠다고 낑낑거리는 사람들은 14K 금장 촉을 단 옵티마 레진 정도로 만족하는 세계, 그 위의 고수들은 18K를 장착한 한정판들만 인정하는 진정 고급의 세계가 있다. 그런데 몽블랑이라니! 그 비싸기만 한 부르주아들의 사인용 만년필이 어찌 고급이던가!
그리고 필기구에 어찌 연필이 빠진단 말인가! 필기구의 범주 안에 노트와 펜이라니, 이럴 수가 있는가! 당연히 이이는 보통의 문구점에서 고급품으로 분류될 스테들러(STAEDTLER) 정도 밖에는 모르리라. 1761년부터 연필의 세계에 종사해온 연필계의 명품 파버 카스텔(Faber-Castell)이 있음은 중요치 않으리라. 그리고 연필의 세계에서 가장 우아한 원목 바디와 글씨를 많이 쓰는 자들을 위한 1.4두께의 심을 자랑하는 이모션 트위스트 펜슬의 가치 역시 모르리라.
노트도 가슴이 아프다. 1000원짜리 모닝글로리에 벌벌 긴다니. 다양한 노트에 눈이 돌아간다니. 노트의 기본은 분류와 재분류의 편의성과 잉크를 견디어내는 힘임을 모른단 말인가. 매끈하고 우아한, 탁하고 힘을 주면 샥 하고 분리되는 무극사 3공 노트들을 모른단 말인가. 잉크가 펑펑 나오는 오로라도 견디어내며 기분 좋은 소리를 내어주는 무극사 노트들을 모른단 말인가.
“하, 진정 고급에 대한 감각이 없는 자들의 세계는 참으로 비루하다! 이자가 나와 같은 문덕으로 분류된다니 이럴 수는 없다!”
비웃음에서 출발했던 감정은 그렇게 한탄이 되고 분노가 되어갔다.
“저 자를 문덕의 세계에서 내치리라.”
심각한 계급적 갈등이 잔인한 감정을 가지게 했다. 이 잡지를 만드는 또 한명의 편집진이 있다. 아담하고 우아한 그러나 식사를 새 모이만큼 하는 그런 분이다. 그 분과 이야기를 나누며 비루한 문덕질을 얼마나 비웃었던지. 거만한 표정으로 나의 오로라를 꺼내들어 모나미와 BIC를 언급하는 그의 말들에 얼마나 흠집을 내었던지. ‘저자는 문방구를 논할 자격이 없다’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던졌었다. 그녀는 ‘그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니었네.’로 결론을 내렸고 나는 만족했었다.
그런데 집에 와서 오로라를 만지작거리고 파버 카스텔을 만지작거리다 필기의 표시와 분류를 위해 사용하는 플레이칼라들이 보였다. 그리고 3M의 스티커들도 보였다. 그들은 비록 싸구려들이지만 나의 소중한 자식들이었다. 물론 오로라가 없어지면 나는 자살을 할 것이고, 플레이칼라가 없어지면 그냥 다시 가서 사겠지만 그래도 그들 또한 사랑스런 아이들이었다. 그들도 ‘학문’이라는 근본적인 정체성이 투여된 도구들이기 때문이다.
“하! 내가 이리 멍청했다니!”
몇 달 전 잠깐 훑어본 진보신당 당원 게시판을 잊었단 말인가. 그들은 모두 이 나라에서 한 줌 안 되는 좌파를 자부하는 사람들이었다. 이 세계가 조금 더 평등하길 바라는 생각을 공유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보여준 모습은 끔찍했다. 저자는 스탈린주의자니 고루한 맑스주의자니 하면서 그들은 무섭도록 서로의 흠집을 잡아냈다. 그들은 자신이 옳음을 보이기 위해 상대를 깎아내리는 방법 밖에는 모르는 듯 했다. 그 한줌 안 되는 세계에서의 영역 다툼은 참으로 참담했다(사실 내가 좌파가 아니라 그렇게 참담하진 않았다). 자신들의 영역을 넓히기 위해 사용되어야할 에너지를 서로를 잡아먹는데 사용하는 것을 보며 혀를 찼었다.
그렇다. 이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한줌 안 되는 문덕의 세계다. 철딱서니 없는 몇몇의 좌파들처럼 지들끼리 싸우느라 에너지를 쏟아서는 안 된다. 중갑보병과 수병들의 서로에 대한 비웃음과 한탄과 분노가 아테네를 쇠락의 길로 인도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문덕의 세계 밖에는 필기구에 자신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일을 비웃는 자들이 널리고 널렸다. 성찰을 담을 도구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이들은 드물고 드물다. 그 드문 동료의 흠집을 잡아 뜯어서 남는 것이 없다.
그와 내가 같은 세계를 공유하는 시민이라는 점이 중요한 것이지 ‘고급’의 의미를 모르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쨌거나 그도 옷이 아니라, 신발이 아니라, 그 죽일 놈의 문방구들에 돈을 부어대는 인간임이 중요한 것이지, 연필을 잠깐 빠뜨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나의 적은 다품종 대량생산 문방구에 환장하는 프롤레타리아 문덕이 아니라 문방구를 ‘따위’로 취급하는 악한들이건만 나는 너무도 어리석었다.
치열했던 자기반성은 끝났다. 작은 흠집은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모습일 뿐이다. 대화는 공통의 것을 공유할 때 가능한 것이 아니라 공통의 것을 공유했음을 ‘인식’할 때 가능하다. 그리고 공통의 것을 넘어 더 넓은 세계를 알고자 할 때 가능하다. 대화가 작은 세계를 넓혀주고 만들어진 세계가 붕괴하지 않도록 잡아준다.
프롤레타리아 문덕은 나에게 대량생산된 저렴한 세계를 열어줄 수 있고 반대로 나는 그를 손으로 만든 걸작들의 세계로 초대할 수 있다. 그는 다양함이 가져다주는 고뇌를 토로할 수 있고, 나는 그에게 더 고귀한 한정판의 세계에 닿을 수 없는 절망을 들려줄 수 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더 풍부하고 더 깊은 문덕이 될 수 있다. 더 깊고 풍부한 문덕질 속에서 다듬어지는 우리들의 성찰은 한 걸음씩 문덕의 세계를 확장시킬 수 있으리라.
하… 그런데 오로라와 파버 카스텔의 세계를 모르는 문덕이라니. 가슴은 그래도 아프다. 하지만 그것이 어찌 그의 잘못일까. 혼란한 세상에 문방구와 고급의 의미가 달라져서 그런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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